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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기획-힘들지만 훈훈한 연말] '선한 사마리아인 봉사회' 이순재 회장

메릴랜드 엘리컷시티 고전마을의 한 빵집(Sweet a Bakery and Cafe). 매일 저녁 어스름하게 어둠이 내릴때면 챙이 있는 모자를 푹 눌러쓴 어수룩한 할아버지가 양손에 상자를 들고 들어선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탁자위에 놓여 있는 도넛을 상자에 넣고 다시 가게문을 나선다. 이순재(75) 할아버지다. “한 2년 6개월 됐어요. 푸드 뱅크를 통해 이 빵집과 인연을 맺게 됐지요. 팔다 남은 도넛을 가져다 다음날 아침 가게에서 흑인 주민들에게 나눠줍니다. 주민들이 너무 좋아해요.” 도넛 봉사는 월요일을 제외한 1년 365일 계속된다. 적게는 50개에서 많게는 하루 100개가 넘을 때도 있다. 볼티모어 다운타운에서 조그만 그로서리를 운영하는 이순재 할아버지에게 있어 가게는 바로 나눔의 현장이다. 도넛을 나눠주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가게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상당부분을 흑인사회에 또는 한인사회에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지난 1974년 도미한 그는 77년부터 ‘리 푸드 마켓’이라는 그로서리를 시작, 나눔운동을 시작했다. 불록 파티를 비롯 크리스마스 파티 등을 열며 이웃들의 친구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워싱턴-볼티모어 일원 각 교회들이 한글학교를 운영하기 이전 볼티모어 한국학교를 13년간 재정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에게 봉사활동의 전환점이 된 것은 지난 1992년. 지인 2명과 함께 비영리단체인 ‘선한 사마리아인 봉사회’를 조직, 본격적인 자선사업에 나섰다. 당시 2만달러가 넘는 돈을 들여 요리가 가능한 트럭을 구입, 직접 빵, 우유, 과자, 캔디, 시리얼 등 200여명분을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11년전에는 메릴랜드 푸드 뱅크의 멤버로 가입, 더 많은 음식을 흑인들과 나눴다. 선한 사마리아인 봉사회는 외부에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 손을 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전쟁당시 이북 출신자들로 구성된 8240 출신인 그는 현재 받는 연금과 사회보장연금, 여기에 가게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재정을 충당한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후원도 큰 몫을 담당한다. 가족들이 매월 600달러를 보탠다. 이렇게 해서 선한 사마리안 봉사회가 연간 봉사활동에 쓰는 비용만도 무려 3만달러. 물론 고스란히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금액이다. “흑인 커뮤니티에 1만달러 정도가 쓰이고 한인 사회나 교회에는 쌀을 전달합니다. 매년 800포~1000포(20파운드) 정도가 나간다고 생각하면됩니다.” 재정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없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나누는 만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선행이 계속되면서 지인들의 따뜻한 손길도 이어진다. 뉴저지 의류 제조 판매업체인 K.S. Trading의 강신억 사장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의류를 제공한다. 이 회장은 이 옷들을 흑인들을 비롯 중국 선교 또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3년전 중국선교를 앞두고 또다른 삶을 경험한 그다. “선교는 가야겠는데 병원에서 전립선암이라고 합디다. 기도중에 수술보다는 중국을 먼저갔지요. 이후 돌아와서 수술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어느날 기도로 기적적으로 완치가 됐어요. 병원에서는 이상하다고 해 검사를 받았는데 암세포가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은퇴를 생각하던 그였기에 이같은 기적은 그를 더욱 봉사현장으로 이끌었다. “봉사한다고 하면 보통 3년을 넘지 못합니다. 지치고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하니 더 신이납니다. 난 단지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줄 뿐이지요.” ‘아프지 않은것 자체가 은혜’라는 그, “건강이 허락할때까지 봉사는 계속하겠지만 ‘선한 사마리아인 봉사회’는 조만간 아들(이상진)이 이어갈 것”이라고 이 회장은 말했다. 사랑나눔이 대를 이어가는 순간이다. 허태준 기자

2009-12-16

[송년기획-힘들지만 훈훈한 연말] 알링턴 거주 이상현 옹

워싱턴 한인 행사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할아버지 사진사가 있다. 바로 알링턴에 거주하는 이상현 옹(73·사진)이다. 그는 오늘도 백발이 성성한 짧은 머리에 다리 한쪽을 절뚝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SLR(렌즈교체식) 사진기를 목에 건채 현장을 누빈다. 그에게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자 “사진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며 “행복한 사람들의 사진속 모습에서 나도 덩달아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 이민 제2의 인생과 불의의 사고 이상현 옹은 지난 1972년 가족과 함께 도미,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 기름을 손에 묻히는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택시 운전을 했던 탓에 차량 손보는 일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자동차 정비를 통해 온가족 영주권도 획득하고 삶에 안정도 찾아갔다. 그뒤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그러던 1980년 10월 6일 뜻밖의 불운이 찾아왔다. 일꾼들에게 연락하고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차를 몰고 나서던 중이었다. 갑자기 맞은편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와 곧장 돌진해 왔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가 구조대원들이 차량 프레임을 뜯어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중에 보니 오른쪽 팔 이외에 성한 곳이 없었다. 뼈란 뼈는 모두 다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식물인간이 될까 걱정도 많았지만 다행히 3개월 후에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곳은 회복됐지만 왼쪽 다리가 문제였다. 목발을 뗄 수 없었고 몸이 성치 못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이 옹은 장장 7년이나 변변한 돈벌이를 할 수 없는 굴욕의 세월을 보냈다. ◇ 사진과의 만남 2005년 암으로 아내를 잃은 후 깊은 외로움이 찾아왔다. 이때 만난 것이 사진이었다. “어느날 노인 모임에 나갔는데 노인들이 사진을 잘 못찍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찍어주겠다’고 ‘그게 뭐 어렵냐’ 하면서 사진기를 손에 잡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자동카메라(흔히 똑딱카메라)로 노인 행사때마다 찍어주는 일을 했다. 그러다 사진에 대해 점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2년 정도 사진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식견도 늘었다. 제대로 사진을 배우기 위해 SLR 사진기도 구입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공부한 아들의 도움도 컸다. 사진작가협회에서 주최한 사진 강좌도 이수했다. 이외에도 주말이면 ‘출사(出寫)’를 업으로 삼는 동료 노인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사진 찍기도 즐겼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주변의 부탁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일주일이면 기름 1통이 모자랄 정도로 왕래가 잦다. 하루에 100마일 이상 달릴 때도 많았다. ◇ 사진 나누기는 약값 대신 이 옹은 이제 자신이 배운 사진 기술을 주변에도 전하고 싶어 한다. 나이 들어 도전에 두려움을 느끼는 노인들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사진 강좌 책자도 꾸준히 써 나가고 있다. 사진을 일삼아 찍다 보니 얻은 것이 또 있다.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다리에 큰 힘을 얻고 건강을 되찾았다. 사실 이 옹이 거의 무료 봉사로 사진 찍는 일에 나서는 것도 일종의 ‘약값 대신 봉사’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상현 옹은 “사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의욕을 상실한 채 남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나에게 있어서 사진은 취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천일교 기자

2009-12-14

[송년기획-힘들지만 훈훈한 연말] '서바이버쇼' 베키 리씨 "매일 가정폭력과 싸워요"

이 가운데 이웃을 돌아보고 따스한 온정을 보탠 분들이 있다. 이들의 따스한 손길이 바로 희망이고 힘이 됐다. 이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엮어본다. <편집자> 포부,계획,선의의 말을 내뱉는 건 쉽다. 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지난 2006년 CBS 방송국의 리얼리티 TV쇼 ‘서바이버(Survivor)’에 출연했던 레베카 ’베키’ 리(한국명 이설희) 씨. 작은 키, 동안의 그는 자신이 버릇처럼 말하던 꿈을 차근차근 이뤄나가고 있다. 무인도에서 펼쳐진 39일간의 생존 경기에 참여한 그는 20명 중 마지막 3인으로 남았다. 당시 또 다른 한인 권 율 씨가 최종 우승자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덜 받았지만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엄청났다. 화려했던 쇼가 끝난지 3년여. 그는 현재 워싱턴 DC에 거주하며 가정폭력 피해자와 가족들을 도와주는 비영리재단 ‘베키스 펀드(Becky’s fund)’를 성공적으로 운영중이다. 변호사로 일하다 TV 출연을 위해 직장까지 그만뒀던 그다. “부모님도 처음엔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쇼가 끝난 뒤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TV에 나왔던 변호사라고 신용을 잃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거요. 하지만 일생에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고 꽉 잡았어요. 위험없이 성장할 순 없겠죠.” 뉴욕에서 태어난 이 씨는 미시간대에서 여성학을, 피츠버그 법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당시 한 강연회에 참석했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이들을 보호하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12년간 그는 전국 아태계 여성 포럼, 여성법 프로젝트, 전국 가정폭력 방지협회 등 하나같이 여성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를 위해 일해왔다. “TV 출연, 만약에 우승까지 하면 분명 제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돕자’는데 대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경험면에서도 서바이버 출연은 많은 도움이 됐어요. 특히 카메라 앞에서 당황하지 않게 된 점, 또 일반인이었을 때보다 언론과 접하는 횟수가 많은 점도 그런 것 중 하나죠.” 물론 우승 상금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받은 우승상금 7만5000달러를 전부 재단 설립에 쏟아부었다. 베키스 펀드는 가정폭력의 심각성과 폐해를 널리 알림으로써 이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한다. 설립 3년만에 지역내 다양한 기관, 전문인들과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이들중엔 의사, 변호사, 심리 상담가, 보건 전문가, 심지어 교통·호텔업 관계자도 있다. 이 씨는 “이민자 여성의 경우 언어 장벽, 문화 차이 등으로 폭력 피해를 당해도 이를 호소할 방법이 없는 점이 늘 마음 아팠다”며 “어떤 사회 계층이든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워크숍, 설명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는 특히 워싱턴 내셔널스와 ‘가정 폭력 알리기 공원 캠페인’, ‘워크 디스 웨이(Walk This Way)’라는 기금 모금 패션쇼를 개최했다. 이 패션쇼엔 워싱턴 풋볼팀 레드스킨스의 클린턴 포티스 선수가 참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인 2세인 그는 자신의 최고 강점으로 “강한 성격과 고집, 인내심”이라고 말했다. ‘싸워보지 않고는 포기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한인 1.5세, 2세들의 모임인 한미연합회(KAC)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이 씨 같은 변호사로 얼마전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소비자 행정국 부국장에 임명된 권 율씨와는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권 씨는 베키스 펀드 이사로 많은 도움을 준다. “가정 폭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이나 인종, 배경,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리지 않죠. 앞으로도 계속해서 폭력 피해 여성과 가족들을 돕고 가정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워싱턴 지역 한인 여성단체와 협력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네요.” ▷웹사이트: www.beckysfund.org 유승림 기자 [email protected]

200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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